예전에 <리딩으로 리드하라>라는 책을 보았다.
그 책의 주제는 수 천년 동안의 천재들의 사상과 사고과정이 그대로 녹아있는
인문 고전을 힘써 읽으라는 것이었다.
책 맨 뒤에는 각 연령별로 권장하는 인문 고전 리스트가 나와있었다.
그 리스트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책이 바로 <열하일기>였다.
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, 쉽게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이었다.
하지만 국어 수행평가로 <열하일기>를 의무적으로 읽게 되었고,
다른 아이들이 책의 방대한 분량에 불평할 때
나는 오히려 귀중한 고전을 이번 기회로 읽게 되었다는 생각에 설레였다.
<열하일기>는 우리나라 고전이 읽기 어렵고
쉽게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내 편견을 산산조각 내버린 책이다.
읽는 내내 그렇게 재미있었을 수가 없었다.
조선 후기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수없이 들게 했다.
즉 박지원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.
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재미있는 곳 마다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.
수많은 <열하일기>편 중
도강록, 성경잡지, 일신수필, 관내정사, 막북행정록, 태학유관록, 환연도중록만 실려있었다.
내용은 박지원이 당시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에
팔촌형 정사 박명원을 따라 갔던 여정을 일기로 남긴 것이었다.
각 날짜마다 일어난 일과 감상만 간단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,
조선과 중국의 다른 점, 그 지역에서 특별히 학문적으로 느낀 점에 대해
매우 체계적으로 비평한 내용이 다 나와 있었다.
나중에 박지원이 말하기를,
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갈 때는 여유롭게 가더니 올 때는
왜 그렇게 많은 종이더미를 가져오냐고 물었다고 한다.
그게 다 일기였다.
매일매일의 삶을 그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하니,
당연히 엄청난 양의 종이더미를 짊어지고 다녔을 것 같다.
특히 인상깊었던 부분은 중국과 조선의 건축에 대해 논한 부분이다.
조선은 집을 지을 때 돌을 끼워맞춰 사용하고 중국은 벽돌을 사용했다고 한다.
박지원은 이 돌 사용이 매우 비효율적이고,
벽돌이 매우 효율적이며 내구성이 좋다고 말했다.
또 중국의 온돌방식이 우리의 온돌방식보다 열이 보존되고 돌아가는 방식이 더 뛰어나다고 말했다.
나는 우리의 온돌과 한옥이 과학적이라는 사실만 계속 듣고 자라다 보니
박지원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조금 의외였다.
하지만 박지원이 당시 조선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니
그런 것도 이해가 되었다.
또 우리나라 것에 대한 장점만 알기 보다는,
이렇게 비교하며 단점을 알아두는 것도
더 큰 발전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.
또 전족, 심양 고궁 등 중국어 시간에 배운 중국 문화와 문화재에 관한 것도 많이 알았다.
또 중국 주변국의 모습,
예를 들면 라마교나 각국에서 건륭제에게 보낸 동물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
그 모습을 자세히 적어놓기도 했다.
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'필담'이었다.
여행지의 중국 친구들과 함께 (말은 안 통하니)글로 대화를 나눈 것도 일기의 부분 중 하나였다.
박지원은 이들과 골동품, '용'을 다룬 중국 관용어(화룡), 기하학, 지구과학, 예수교 등에 대해
얕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.
나는 특히 기하학과 지구과학 이야기가 놀라웠다.
박지원은 또 다른 실학자인 홍대용과 친구여서
그에게서 이런 과학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,
이 필담을 통해 그 내용을 알려준 것이다.
그런데 그 내용이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과학 내용과 비슷한 것이 매우 많았다.
또 서양에서 그런 이론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
어쨌든 필담에서는 홍대용이 지전설을 '창안'했다고 하니
이론 중 홍대용 스스로가 생각한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했을 것이다.
이 밖에도 허생전, 환희지(요술극을 보고 쓴 일지) 등 재미있는 내용이 참 많았다.
마지막에 필담 벗들과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리고 아쉬워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아쉬웠다.
계속될 줄만 알았던 열하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.
<열하일기>를 읽는 내내 한자어가 많이 나온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.
중간 중간에 돌발 상황에 하인들이 능청스럽게 대처하는 부분이나,
박지원의 유머, 주요 여정 이외 혼자 밤에 나와 돌아다녔던 일 등
갖가지 에피소드 덕분에 더 그랬던 것 같다.
딱딱한 고전을 벗어나 '살아있는'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.
그야말로 '세계 최고의 여행기'<열하일기>다.
이 책을 읽기 전의 나처럼, 고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<열하일기>를 꼭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.
-201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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